교회, 진리를 둔 소통의 문제

2010. 2. 9. 02:36in Jesus/교회의 안과 밖

 이 땅에 산다는 것 자체로 너무나, 전제해야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통'의 문제죠.
 일단, 개인적으로 저란 사람은 고고학자가 되고 싶어 사람에 관심이 많으며, 종교인(기독교, 특히 보수성과 대형화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모 교회에서 꽤 오랫동안 있습니다)이며, 대입성적이 안되서 신문방송학과(근데 문제는 문제의식 갖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성공회대학교 학생)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돌아보면 굉장히 언밸런스한 조합이죠... 이솝우화 중에 '박쥐'에 관한 이야기가 있던가요. 날짐승에도, 들짐승에도 끼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연의 동물. 전 때때로 그런 존재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짧으면서도 장황하게 저에 대한 소개를 하는 이유? 이 땅에 산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적어도 세가지 시선에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박쥐'처럼 무시당할 수 있지만, 어쩌면 세가지 모두의 시선을 담아낼 수도 있을테니까 말이죠...
 
 일단 먼저 두가지 구절을 풀고 시작할까 합니다. 하나는 도덕경의 이야기이고, 하나는 성서 요한복음의 이야기입니다. 도덕경 41장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사 중사 하사(上士 中士 下士) 세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상사는 '도'에 대해 들으면 그것을 힘써 지키려는 사람, 중사는 어찌해야할지 갈팡질팡하는 사람, 하사는 진리를 큰소리로 비웃는 사람이랍디다. 그런데 세상에는 상사, 하사보다는 중사에 속하는 사람이 더 많으며, 상사의 목소리보다는 하사의 목소리가 더 큰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하죠. 
 또다른 이야기,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18장 28절부터, 19장 16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옮기기에는 너무 많아서 링크로 대신하고... 간략히 내용을 보자면 예수님이 유대인들에 의해 잡혀 로마관청에 끌려가 십자가 처형을 언도받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4복음서 모두 다르게 기술되는데(그냥 막 읽으면 비슷하긴합니다만 잘 읽어보면 각 복음서마다 어떤 이야기를 강조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일종의 '구도자'로서 빌라도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특히 '진리가 무엇이냐'(요한복음 18 : 38) 묻는 빌라도의 물음은 진리가 무엇인지 묻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그 '진리'가 무엇인지 궁금했고, 알고 싶어했지만, 가장 인간다운 결정을 하게 되죠. 눈 앞에 보이는 '큰 것'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구절을 보면 빌라도는 직감적으로(?) 예수님이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18 : 39, 19 : 9 - 10). 최소한 적어도, 죽일만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19 : 4, 19 : 12). 하지만 성난 유대인들의 함성 소리에 그를 고문하고(19 : 1), 재판하여 십자가 형을 선고(19 : 13 - 16)하고 맙니다.
 
 
 아무런 연관성 없어 보이는 도덕경의 이야기와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사실 사람은 어떤 존재이며, 어떤식으로 소통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는지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는 구원자로서의 예수, 구도자로서의 빌라도, 피지배자이지만 지역에서 전통과 권위를 갖는 유대인들이 등장합니다(다른 종교를 믿는다든지, 무신자, 특히 기독교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구원자가 될 수 없겠지만, 여기까지 왔다면 끝까지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본능적으로 구원을 찾는(어떤이들은 안식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사람의 특성상 빌라도와 같은 물음, 진리를 구하는 일는 언제나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닥쳤을 때 어떤 것을 선택할는지는 '빌라도'가 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사람은 결국 자신이 가치를 두는 쪽을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자기 안에 고민을 품어보지 못한 사람은 - 다시 말해 절대적인 가치를 찾아본 경험이 없거나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 이런 선택에 무관심해집니다. '소통'의 문제는 처음, 관심을 조금이라도 가져보았느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시작하겠고요, 그 단계가 지나면 얼마나 균형있게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해 보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최종적으로 가치판단을 하는 이성적인 논의가 가능하느냐 불가능하느냐가 이 자세에서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실수를 합니다. 실수를 하는 과정 속에서 경험을 얻게되고 실수를 줄이려 하죠. 이를 보고 우리는 성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얼마나 '진리'에 기대 생각을 해보았을까요. 세상의 소리에 진리를 두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따를 것이고, 믿는 것이 있고, 신념을 두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따를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의지를 지닌 사람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생각한 결과를 통해 그 사람의 삶을 알 수 있고, 삶의 향기를 통해 그 사람의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잠시 논의를 개인이 아닌, 조직화된 교회로 넘겨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기독교'가 갖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화려한 성전, 비까번쩍한 교회당의 모습. 공격적인 전도와 선교의 모습이 이 시대 보통의 'non 크리스챤'이 갖는 교회에 대한 이미지일겁니다. 이것이 적어도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하사下士'들의 외침입니다. 이들의 외침이 모두 옳은 것도 아니며, 진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의 말에도 맞는 말, 받아들이고 고쳐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특히 한국 교회는 시대(정치, 경제)와 타협하고, 문화는 배격하지만 그 모양을 흉내내는 쪽으로 점점 옮겨져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초기 기독교의 정신(가치)과는 상관없는 것들로 논쟁이 점화되고, 그것들로 점점 상처받아가고 있으며, 심하게 말하자면 누더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할 교회는 가장 부패한 집단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시대의 하사下士'들은 그 지위가 계속 달라졌는데, 민주주의는 이런 하사下士들을 주인으로 삼는 정치체계죠.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는 열방이 바로 '하사下士'들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이들을 납득시킬수 있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이것이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을 경영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아무리 듣기 싫은 소리라 할지라도 교회가 세상의 소리에 민감하고 통감해야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끼리 잘 살 생각이라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는게 낫겠죠.


 하지만 현재의 세계에서 크리스트교는, 한국에서 기독교(개신교)는 초대 교회 시절에 탄압받았던 것을 분풀이 하듯, 그 탄압했던 위치에 올라 군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바라보았던 부패한 구교(카톨릭)의 모습을 점점 답습해가는 교회의 오늘에서 과연 '구원자'의 이름은 어디에 위치한 것일까요. 교단이나 총회의 회장이 되어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하거나, 복음과 무관한 혹은 복음을 왜곡한 메시지로 인기에 영합하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보였던 것들은 결코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선생으로서 사랑으로 가르치고, 치료자로서 아픈자와 함께했으며, 왕으로서 백성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몽둥이를 휘두르며 분노하지 않았고, 기적을 일으키며 돈을 바라지 않았으며, 동정한다고 깔보고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선교라는 이름으로, 전도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군림하려는 '진리'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고민이자 아픔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약함으로 진리가 가려지는 것은 그 어느것과 비교할 수 없는 안타까움입니다. 지난 세대의 실수에서 오늘날 한국교회는 과연 무엇을 배웠을까요. 모든 이가 보기에 '상사上士'와 같은 고민과 노력을 하는지, 혹은 '빌라도'처럼 구하기만 하다가 결국에는 그릇된 선택했는지 고민해보야하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받기 직전, 말세에는 누구든지와서 '내가 그다' 할때 속지 말라 경고하셨었습니다. 그 경고 속에 있는 '주님을 참칭하는 자가 이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항상 깨어있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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