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각감수성

2017. 11. 24. 20:02물건사색/사진/이미지



0. 도입

135포맷의 필름카메라에서 28mm 렌즈는 광각의 영역에 속한다. DSLR 카메라가 보급되면서 (환산화각) 28mm-80mm 영역의 줌렌즈가 제공되는 것(번들렌즈, 일반적으로 18mm-55mm라고 표기되어 있다.)을 보자면 광각의 시작점이라고도 볼 수도 있겠다. 이런 28mm 렌즈가 있어도 APC-S 규격, 흔히들 말하는 1.5 크롭 규격에 마운트한다면 환산 42mm에 해당하는 표준화각에 속하는 평범한(?) 화각의 렌즈가 된다. 게다가 나의 경우는 APC-S DLSR에 28mm 렌즈보다는 45mm나 50mm의 조합을 이용했기 때문에, 환산 67mm - 혹은 75mm의 준망원에 가까운 화각으로 꽤 오랫동안 사진을 찍어온 셈이다.

그러던 습관, 혹은 화각의 익숙함을 두고 필름카메라에 28mm 렌즈를 마운트하게 되니… 화각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글은 28mm 렌즈에 135포맷의 필름카메라를 조합해놓고 정말 오랜만에 느낀 이질감을 극복해보고자 36컷짜리 필름을 다섯통째 사용하고 있는, 지금 나의 느낌에 대한 이야기다.




1. 화각감수성

아는 형의 집에서, 주인 형 말고 또 다른 형의 수동카메라를 접하면서 사진을 배웠다. 멋도 모르고 그냥 찍다가 재미없다고 생각하고 몇달을 버려뒀다가. 집어들었다가. 버려뒀다가. 집어들었다가. 그렇게 근성없이 1년 정도는 찍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다가 약 1년 정도 시간이 흐르고, 우연찮게 찍었던 봄꽃에 마음이 동하면서 나는 지금까지 꽤 오랜 시간 사진기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겉멋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낭만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냥 즐거웠다. 즐겁다보니 사진은 꽤나 잘 찍혔던 것 같고, 장비에 대한 불만이 약간은 있었지만 그냥저냥 50mm 단렌즈로 꽤 많은 것을 찍으며 다녔다.

어느새 15년. 필름보다 더 많은 시간동안 '편리함' 때문에 디지털 카메라를 썼고, '필요함' 때문에 많은 렌즈를 사용해봤다. 그래도 취미에 한해서는 늘 (저렴하고 성능좋은) 수동 단렌즈와 DSLR의 조합을 사용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가벼운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더욱 그렇다. 아무래도 판형의 차이가 똑딱이보다는 렌즈교환식 카메라를 선호하게 하긴한다. (본심은 그것보다 클래식한 사진기가 주는 묘한 허세가 좋아서 일 수도 있다.)

사진을 찍으면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 개인에게는 자기가 편하게 여기는 적정 화각이 있다고 한다. 굳이 용어를 만들자면 화각감수성 쯤 될듯 싶다. 요즘이야 카메라를 사든 휴대전화로 찍든 줌인 줌아웃이 기본이다보니 이 말이 그냥 스쳐지나가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일 때문이 아니라면, 손이 모자라는 상황이어서 렌즈를 교환하기 힘든 상황이 아니라면 단렌즈를 쓰는 내게 화각감수성은 보다 민감하게 다가오는 면이 있다.


2. 인식과 선입견

나는 넓은 시야를 중시하는 본능(?)을 갖고 있다. 역사를 좋아했고, 미시적인 사건보다 거시적인 구조를 즐겨보는 편이다. 보다 넓게보고, 다양한 것들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넓게 보는 것이 편하다. 그런데 지금껏 살아오면서 넓은 것을 추구하며 겪는 피로감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점점 구체적이고 정밀한 것을 추구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번에 필름카메라 + 28mm렌즈를 쓰면서 보다 명확해졌다. (이하 필28 조합이라고 하겠다.) 사진은 보이는 것을 다루는 작업이다보니 '시야'에 대한 감성이 자극되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래 나의 성향상 필28 조합은 그리 나쁘지 않은 조합일테다. (생각만으로는 괜찮은 조합이다 싶어서 마운트하고 다녔던거다.) 그런데 뷰파인더를 보면 볼수록 불편하다. 피사체를 강조할 수 없고, 프레임 안에 쓸데 없는 요소가 너무 많이 들어온다. 카페나 집 등 실내에서 사람을 대상으로 할 때는 그나마 괜찮지만 주로 찍게되는 풍경, 특히 도시에서는 더욱 어렵다.

생각해보면 내가 장비를 확충하면서 가장 먼저 구입했던 렌즈는 초광각렌즈에 해당하는 12mm-24mm 렌즈였다. 환산 18-36에 해당하는 이 렌즈는 처음 두 주 정도는 큰 만족을 줬지만 이후에는 가끔 들고나가는 관상용 렌즈가 되었다. 되려 매우 저렴하게 구입한 100mm-300mm 렌즈를 갖고 풍경을 찍으러 다녔다.

무엇보다도 여행을 갈 때 포함시키는 우선 순위를 보면 알 수 있다. 성향상 28mm, 45mm or 50mm 단렌즈는 반드시 포함시킨다. 나 혼자만 찍는 것이 아니라면 AF가 되는 17mm-50mm를 포함시키며, 다음 순위로 늘 100mm-300mm를 포함시킨다. 혼자 찍게 되면 28mm도 빼고. 17mm-50mm도 뺀 채 50mm + 100mm-300mm를 쓰는 편이다. 초광각을 들고 간 적은 거의 없다.

분명 나는 넓은 시야를 중시한다. 나무보다 숲을, 개인보다 사회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화각감수성을 통해 보았을때 나는 꽤나 구체적이고 세밀한 것을 중시하는 것이다. 왜일까?


3. 인식과 실제의 차이

나는 관조하는 관찰자의 성향을 짙게 갖고 있다. 특히 나의 셔터질로 인해 누군가 의식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다. 그렇게 의식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같이 부끄러워지고 불편해지는 느낌까지 받는다. 초창기의 캔디드 사진마저도 이젠 찍지 못하는데엔 이런 아웃복서 스타일의 성향의 영향이 크다.

다만 그런 성향과 반대로 상대방, 혹은 대상을 바라보는 것, 관찰하는 것을 상당히 좋아한다. 나쁘게 말하자면 변태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다만 내 양심을 걸고 말하자면, 도촬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단 의도치 않은 도촬은 상존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망원화각을 좋아하는 기본적인 이유인 것 같다.

또한 눈에 보이는 요소들이 많아지는 광각은, 오히려 피사체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 '나중에 크롭하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촬영했지만 버린 사진들이 제법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기회가 되었을때 원하는 화면구성으로 촬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촬영하는 양이 늘어나고,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그 피로감을 감당하기 귀찮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관찰은 좋아하되 방해하고 싶지는 않고, 그것을 바라볼 때 방해하는 것들을 배제하고 싶은 마음. 나의 성향은 꽤나 까다롭고, 그 까다로움은 설명하기 복잡한 '나'라는 개성을 의미한다. 지금 쓰다보니 생각나는 이미지는, 위장막을 덮고 벙커에 숨어 동물 등을 관찰하는 느낌이다. 


4. 결론

화각감수성을 생각해보니 스스로에게 갖고 있던 이미지와 꽤나 큰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별거 아닌 생각을 이렇게 길게 쓴데는 여전히 '나'라고 하는 존재가 나에게도 발견되어 질 부분이 많다는 의외의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 잘알고 있다 싶었던 무엇, 특히나 '나'라고 하는 존재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오늘의 나는 여전히 부족하다. 

존재에 대한 깨달음만큼 무겁고도 재미있는 일은 없는 듯 싶다. 그 재미에 무거움이 깔려 있는 편이라 피로감 느껴지기는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