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학루駕鶴樓, 가학루기駕鶴樓記

2015. 10. 8. 23:28익숙함과 거리감/한국韓國


폭포 위 언덕에 자리한 누각, 가학루.
 


가학루에 대한 설명
 


가학루駕鶴樓

필동암과 용주담 글씨가 새겨진 폭포 옆의 언덕에 세워진 누각입니다. 뚜렷한 기록이 없어서 언제적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1947년 중수하면서 남겨진 기록에 '대원군이 쓴 가학루 현판이 있었다'고 보아 대원군 시기부터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현재 남아있는 정자는 네 차례정도 수리했으며, 1930년대의 대들보인 것 같다고 얘기한답니다. 정자를 받치고 있는 돌기둥이 경복궁 중건 당시의 양식과 같다고하니 대원군 시기, 인근 광륜사가 신정왕후 조대비 (1808-1890)의 별장이었던 시기와 연관된 정자로도 보입니다.
광복 후 이 땅을 소유했던 송석 박문규가 1947년 중수하면서 옥소 심형진이 짓고, 낙운 윤희채가 쓴 가학루기 駕鶴樓記와 현판이 있었다고 하지만 '있었다'는 기록만 도봉구청에 남아있을뿐 행방이 묘연합니다.



가학루기駕鶴樓記

古有四人各言其志   고유사인각언기지
一人願得十萬錢   일인원득십만전
一人願騎鶴乘仙   일인원기학승선
一人願爲楊州刺史   일인원위양주자사
一人願腰帶十萬貫乘鶴下楊州   일인원요대십만관승학하양주
一人兼得三人之   일인겸득삼인지
願其志大矣徒言谿   원기지대의도언계
益蓋錢與刺史實難騈得而   익개전여자사실난병득이
況乘鶴乎此非人力之所及也   황승학호차비인력지소급야

오래전 네 사람이 각기 자신의 원하는 바를 말했다.
한 사람은 십만금을 원했다.
한 사람은 신선이 되어 학을 타는 것을 원했다.
한 사람은 양주 자사가 되기를 원했다.
한 사람은 십만관의 요대를 차 학을 타고 양주를 거느리는 것을 원했다.
이 사람이 세 사람의 원하는 바 모두를 갖겠다는
큰 바람이 있는데 말로만 어떻게 이룰까
재물과 벼슬을 겸해 얻는 것도 힘들 뿐더라
학까지 탄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닿을 수 없는 것이리라.



楊州之道峰卽靜庵先生讀書處也   양주지도봉즉정암선생독서처야
山回路轉雲深谷幽遂   산회로전운심곡유수
綠溪而行二里許則天竺峰聳立   녹계이행이리허즉천축봉용립
萬犬恰如朝官捧笏之像   만견흡여조관봉홀지상
岩壑幽邃花木芬芳中   암학유수화목분방중
有別開洞天此乃   유별개동천차내
舊日趙判書成夏之別莊也   구일조판서성하지별장야

양주의 도봉은 정암 선생이 독서하는 곳이다.
산길을 따르면 구름 흐르는 으슥한 깊은 골짜기에 이르고
푸른 시내를 따라 2리를 가면 천축봉이 솟아있는데
흡사 수많은 관원들이 홀을 받드는 모양이다.
바위와 골짜기는 깊고 으슥하며 꽃나무들의 향취 가운데
특별한 동천이 있는데 뜻밖에도
옛날 판서 조성하의 별장이 있다.



余友朴松石文圭   여우박송석문규
生長松陽早修學業無意官路   생장송양조수학업무의관로
着想拔貧以聞陶朱之名占   착상발빈이문도주지명점
得此地山林垈田數十萬坪也   득차지산림대전수십만평야
風霜雖下幾何而   풍상수하기하이
江山之代謝如此何   강산지대사여차하
松石素有煙霞泉石之癖而   송석소유연하천석지벽이
今年築一亭   금년책일정
翌年構一閣   익년구일각
又翌年架一橋   우익년가일교
多用巨資其工役十有星霜   다용거자기공역십유성상
可知九仞之功不   가지구인지공불

내 친구 송석 박문규라고
송양 태생으로 학업을 일찍 마쳤으나 관직에 뜻이 없고,
가난을 벗어나 옛 도주와 같은 삶을 얻고자
이곳의 땅, 산숲터밭 등 수십만평을 얻었다.
풍상을 겪었으나 기하하게 되었다.
강산을 다음처럼 사용했는데
송석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기질이 있어
올해 정자를 지었으면, 이듬해에는 누각을,
그 이듬해에는 다리를 지었는데
공역에 큰 돈과 오랜 시간을 들여서
공사된 결과가 훌륭하고 든든했다.



樂雲專委來訪則松石適在   락운전위래칙송석적재
把手論襟對酌於水閣   파수론금대작어수각
一練瀑布飛灑閣前   일련폭포비쇄각전
其喧爽之饗不知是雨是水矣   기훤상지향부지시우시수의
酒至耳醺松石語   주지이훈송석어
余曰此樓之扁額   여왈차루지편액
卽大院君之遺墨而   즉대원군지유묵이
流失其間先生墨爲我   유실기간선생묵위아
一記否故余不敢辭而   일기부고여불감사이
言曰   언왈
公本家贍地占楊州   공본가섬지점양주
樓名駕鶴   누명가학
帶貫乘鶴之魚非公而誰耶   대관승학지어비공이수야
松石莞而笑洗盞相酌   송석완이소세작상작
不知玉山之自倒矣   부지옥산지자도의

낙운이라는 친구가 송석이 거하는 곳에 찾아갔다.
수각에서 손을 맞잡고 흉금을 터놓으며 술잔을 나누었다.
한줄기로 쏟아지는 폭포는 수각 앞에서 가루가 되고
그 울부짖는 듯 시원한 소리는 빗소리 같기도하고 물소리 같기도 했다.
술이 머리 끝까지 얼큰하자 송석이 말하기를
“내가 알기로 이 누각 편액은
대원군이 내린 것인데
유실된 지금, 선생이 나를 위해 써주게.”
나는 이 청을 사양할 수 없었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양주에 집과 넉넉한 땅을 가졌고
누각의 이름도 가학루라고 했으니
십만금짜리 요대를 차고 학을 타는게 그대가 아닌가.”
송석은 빙긋 웃었고, 잔을 씻어내듯 서로 술을 주고 받았다.
풍채 좋은 사람이 쓰러지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歲在彊圉大淵獻仲夏下記   세재강어대연헌중하하기
玉蘇沈衡鎭記樂雲尹禧采書   옥소심형진기락운윤희채서

정해丁亥(彊圉大淵獻)년(1947년) 여름 기록하다.
옥소 심형진 짓고, 낙운 윤희채 쓰다.



2011년 도봉문화원 발행 <2011 도봉구우수평생교육공모사업선정-교재 발췌, 의역을 조금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