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바위글씨 ③,④ 필동암必東巖(岩), 용주담舂珠潭 _ 서울 도봉

2014. 5. 16. 19:26익숙함과 거리감/한국韓國

제일동천 바위글씨가 위치하는 곳은 도봉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 있는 절벽의 위쪽입니다. 그 절벽을 통해 위, 아래가 나뉘고 계곡의 물이 폭포가 되어 쏟아지는데, 이 곳에 대한 정확한 명칭은 없지만 꽤나 수려합니다. 특히 수량이 많아지는 여름에는 폭포의 힘과 무게감에 압도되기도 하죠. 용주담, 필동암 바위글씨는 이 폭포 아래에 위치한 바위글씨입니다.
 
 


장마철 동안 물이 불어난 도봉폭포의 모습. 왼쪽 바위에 필동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있다.
 
 
 


옛 글자는 오른쪽부터 읽는다. 나무에 조금 가려졌지만, 힘있게 '필동암'이라 새겨져있다.
 

필동암必東巖(岩)
순자 荀子 유좌 宥坐 편에 공자의 제자 자공과 공자의 문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자가 물을 보고서 느껴야 할 점이 무엇입니까.'라 물었을 때 '만 번을 굽이쳐 흘러도 반드시 동쪽으로 향하니 의지가 있는 것과 같다 其萬折也必東 似志'고 답했습니다. 만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간다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만번을 꺾여 흐르지만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는 황하강과 같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본뜻대로 나아가는', '절개'를 의미합니다.
도봉서원과 관계가 많은 우암 송시열 선생과 관련한 글귀로 적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스스로를 화양노부라 부르며, 훗날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화양서원 부근 바위에도 만절필동이란 글귀가 새겨져있습니다.
 
 
 


필동암 글씨의 맞은 편(?)에 보이는 용주담 바위글씨.
 

용주담舂珠潭
필동암이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는 위치에 서있다면, 고개를 왼쪽으로 120˚쯤 돌리면 용주담 글씨와 마주할 수 있습니다. 찧을 용 舂자와 구슬 주 珠, 구슬이 찧어지는 개울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과 웅덩이를 표현한 글귀로 여겨집니다. 어느 시점에 이런 구절을 떠올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곳을 많이 아끼는 사람의 글귀일 것 같습니다.
 
 
 


폭포 위 언덕에 자리한 누각, 가학루.
 

가학루駕鶴樓
필동암과 용주담 글씨가 새겨진 폭포 옆의 언덕에 세워진 누각입니다. 뚜렷한 기록이 없어서 언제적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1947년 중수하면서 남겨진 기록에 '대원군이 쓴 가학루 현판이 있었다'고 보아 대원군 시기부터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현재 남아있는 정자는 네 차례정도 수리했으며, 1930년대의 대들보인 것 같다고 얘기한답니다. 정자를 받치고 있는 돌기둥이 경복궁 중건 당시의 양식과 같다고하니 대원군 시기, 인근 광륜사가 신정왕후 조대비 (1808-1890)의 별장이었던 시기와 연관된 정자로도 보입니다.
광복 후 이 땅을 소유했던 송석 박문규가 1947년 중수하면서 옥소 심형진이 짓고, 낙운 윤희채가 쓴 가학루기 駕鶴樓記와 현판이 있었다고하지만 '있었다'는 기록만 도봉구청에 남아있을뿐 행방이 묘연합니다.





- 드래그를 통해 돌려볼 수 있는 VR입니다 -
6월(위)과 8월(아래), 도봉폭포와 주변의 모습입니다.



GPS 좌표 : 37.687237, 127.033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