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와 압살롬

2013. 3. 28. 21:18in Jesus/신앙고백

돌아보면, 성경에 있는 말씀은 묘한 대구를 이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시대와 화자가 달라서 그럴 뿐, 함께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은 듯...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제가 받을 몫을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살림을 나눠 주었다. 며칠 뒤 작은 아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챙겨서 멀리 다른 나라로 떠났다. 그러고는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했다.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 그 나라 전역에 심한 흉년이 들어 형편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그 나라 사람에게 일자리를 얻었는데 그 사람은 그를 들판으로 내보내 돼지를 치게 했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서 말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부해서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 말해야겠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으니 그저 하나의 일꾼으로나 삼아 주십시오.'
그러고서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아들이 아직 멀리 있는데 그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불쌍히 여겨 아들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췄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아들이라고도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와 이 아이에게 입혀라.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 잡아라. 잔치를 벌이고 즐기자.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이 아들을 잃었다가 이제 찾았다.'
그렇게 그들은 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큰 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음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인지 물어 보았다. 하인이 대답했다.
 '동생이 왔습니다. 동생이 건강하게 무사히 돌아와서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나와 그를 달랬다. 그러자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종노릇하고 무슨 말씀이든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며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녀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는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이다. 그러나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그를 잃었다가 찾았으니 우리가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 "

- 누가복음 15 : 11 ~32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렘브란트 Rembrandt , 1669, Oil on canvas, 262 x 206 cm, The Hermitage, St. Petersbur, Russia




일반적으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는 헛짓거리를 한 차남이 회개하며 아버지에게 돌아온 이야기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좀 더 진행해보면 늘 함께 있었던 장남의 투정과 그것을 달래는 아버지의 반응과 같습니다. 대부분은 차남의 시각을 반영해 설교하며,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가에 관심을 둡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한 예수님의 입장에서, 그분은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기에 이 이야기를 전했을까. 그리고 누가복음 저자는 왜 이 이야기를 굳이 실어넣었을까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다른 한 부분은 구약에서, 실존했던 인물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다윗입니다. 아들은 압살롬이구요. 비록 다윗과 압살롬의 경우는 탕자의 경우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지만 대체로 비슷한 흐름을 따라갑니다. 탕자 이야기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있다면 다윗과 압살롬은 '왕'이라는 자리가 추가된 것 뿐이죠.

다윗과 압살롬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들(압살롬)은 어느샌가 아버지께 불만을 가졌고(삼하 13장), 아버지(다윗)는 '왕'이라는 자리와 '아버지'란 자리에서 이 아들의 불만을 받아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로는 한없이 품고 싶었지만 왕으로서는 품을 수 없는 꿈을 가진 아들의 존재는 결국 왕권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심지어 '왕'인 아버지를 죽임으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던 아들에 의해 아버지는 쫓겨나고말죠. 아버지 왕을 따르던 신하들의 지혜에 의해 다윗은 아들을 이기지만(삼하 18장) 결코 신하들을 칭찬하지 않았습니다(삼하 19장). 오히려 아들을 애도해 대성통곡함(삼하 18:33)으로 인해 자신을 위해 일한 신하들의 원망을 들을 정도(삼하 19:6)였습니다.

예수님은 탕자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그늘막이 되며, 모든 자의 소망이 되는 하나님 '아버지'를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접하는 우리는 모두 탕자와 같아서 아버지의 은혜만을 느낍니다. 하지만 곰곰히 살펴보면, 교회 등의 공동체 안에서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장남의 불만과 혹은 다윗을 위해 목숨바쳐 싸웠던 신하들의 입장에도 처해있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은혜를 '받는' 입장에 그친다는 것은 언젠가 그 은혜를 잊을 수도 있다는 얘기도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수많은 체험을 통해 기적을 통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신성함(혹은 비범함)을 알았을 텐데, 왜 그들 모두는 증인이 되지 못했을까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처럼, 삶은 묘한 댓구가 어울리는 역설의 세계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역설은 상황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는 사람의 특수성에 기인합니다. 누구나 탕자나 압살롬이 될 수도 있고, 장남이나 신하들이 될 수도 있으며, 아버지나 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복잡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함께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들은 아들들 혹은 압살롬과 신하들이 아니라 아버지와 왕이 됩니다. 왕과 아버지의 간절한 사랑이 주제이고, 사람의 이중성(탕자와 장남, 압살롬과 신하)이 부제쯤 될 겁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리고 그분을 알아가면서 복잡하지만 너무나 직관적인 감정의 시스템을 왜 우리에게 허락하셨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기 때문에 위대하시지만, 모든 것을 갖고 계시고, 품고 계시기에 좀 '찌질'합니다(세상은 쿨하게 뭔가 버릴 줄 아는 것을 멋지다고 하는데 말이죠). 다윗이 왕권과 부권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것은, 그리고 죽은 아들을 놓고 오열했던 것은 하나님이 어디에 보다 중점을 두고 계시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힌트가 됩니다. 다만 원수는 우리의 이런 생각을 멈추길 원하며, 실제로 멈출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계발해 깊은 사랑과 한 단계 더 높은 곳을 향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사람의 선택은 옳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탕자의 선택을 옳았지만, 압살롬의 선택은 옳지 못했다는 것이 같은 이야기가 다르게 비춰지는 이유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사랑받았지만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지혜로 내려다 본 것이 아니라 아들의 지혜로 하늘을 향해 맞섰기 때문입니다.

왜 전도하고, 왜 선교하느냐는 질문이 많습니다. 기독교는 '절대'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무게추를 재고 이게 맞다, 이게 그르다를 판단하는 사고체계, 신앙체계가 아닙니다. 그 과정에는 탕자처럼 사랑을 깊이 체험한 자도 있고, 장남처럼 자리를 지켰기에 (불만은 있겠지만) 존재하는 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압살롬처럼 죽는 사람도 생기는 것이고, 아버지처럼 오열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길에 함께 가자고 손을 내미는 것이 참된 전도와 선교입니다.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진정한 소식이 되려면 그 소식을 듣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선택해야 합니다. 방법적인 면은 여전히 고민되지만, 전해야하는 것이 아버지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꼬인)것들이 정리할 때가 오리라 예언됨을 믿으며 사는 것이 참 된 교회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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