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찌꺼기를 제거하자

2010. 9. 19. 03:45in Jesus/신앙고백

  매일 느끼는 거지만. 저의 생활에는 군더더기도, 찌꺼기도 많습니다. 심플Simple함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믿고 싶을 정도로... 제 생활습관이 그런 것일수도 있고, 이런게 제게 있어 자연스러운 것일수도 있고...

 그래도 자연自然스러움이라는 것에 조금쯤 더 도전해볼까 합니다. 고등학생 3년의 시절. 그리고 입대하기 1년 반까지... 물론 고등학생 이전에도 그랬지만, 자연스러움이란 단어는 내 인생의 화두와도 같았습니다.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 두가지 이야기는 자다가도 깰 정도로 심취했던 부분이었습니다. 그때의 결론은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모든 개체의 자연스러움을 증거하는 산물이다', '난 어떤 개체이다', '따라서 내가 추구하는 자유는 자연스러움의 산물이다'. 요약했지만 여전히 알쏭달쏭하네요. 아무튼 시시껄렁하지만 나름 진지했던 개똥철학이 있었기에 저는 나름대로 자신있게 살아왔고, 저만의 색깔을 지속적으로 만들고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자연스러움에는 여러 속성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리기 훨씬 전이었지만, 그것들이 보다 명확하게 정리된 것은 요즘입니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은 배고프면 화가난다', '이전에 많이 부정적이었고 회의적이었던 내 삶의 태도는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따라 심히 '낙천적'으로 회귀해간다' 등등이 저 개인의 자연스러움의 속성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언어화 한 것들입니다(배고프다는 기본 욕구를 이전에는 누르고 있었다는 것이고, 제가 낙천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이전에 이미 글로 적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연스러움의 속성 중에는 또다른 한가지가 있는데 삶 속에는 '무엇인가에 기대는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런 것이죠. '누군가에 대항하기보다는 순순히 따라가서 편해지려는 것들', '이전에 비해 질서에 순응하려는 것들', '그 과정에서 대세에 순응하는 것들'입니다. 실은 맨 위에 짤방은 방파제 옆의 갯벌이나 고속도로변의 차음벽을 타고 성장하는 넝쿨식물을 올리려 했습니다(만 없네요. 이상하거나). 그것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는 기대어서, 의존해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나타내는 자연환경 속의 증거 - 본능입니다. (환경론자들의 말을 반박하려고, 혹은 개발주의자들의 주장을 지지하려는 것은 아니다만) 어떤 방조제, 방파제의 건설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놀라운 속도로 환경의 변화 - 그것이 인공이든 아니든 - 를 받아들이고 다시 자신의 것을 그 위에 덧붙입니다. 그것이 서해에 방조제를 세움으로 많은 갯벌이 파괴되고 손상되어도, 어느새 자신을 회복함으로 갯벌이 다시 생기고, 거기에 자연의 산물들이 다시 생존하는 것입니다. 다른 경우로 인간이 세운 벽에 넝쿨식물이 자람으로 기묘한 공존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자연은 어떤 변화에도 적응, 순응하는 '자연스러움'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어쩜 대세에 순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표시하는, 자연인임을 증거하는 표상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장황한 이 글은 제 모습을 합리화 하는 것일 수도 있구요. ㅜ
 

 하지만 위에서도 적었지만 이런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에 도전해볼까 합니다. 기대기만 하는 인생, 흘러가는대로 순응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찌꺼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속성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순환에 기초합니다. 무엇인가가 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가 죽어야하죠. 그것을 두고 '먹이그물'이라 불리는 생태계의 속성으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런 찌꺼기는 그나마 낫습니다(순환에 도움이 되니까요). 하지만 순환에 도움이 되지 않는 찌꺼기를 양산하는 능력이 있는게 삶이기도 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삶의 속성 중에는 자연스러움을 '과하게' 추구하는 과정에서 찌꺼기들이 발생합니다. 잉여시간을 헛되게 날린다든지, 효율이 떨어진다 등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논지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죄'라고 하는 찌꺼기가 삶 속에 하나하나 양산되고 있다는 걸요.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사람은 '원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상 아담과 하와는 순전하게 태어났지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죽음에 이릅니다. 그 죽음은 죄를 의미하며, 사람은 죄로 인해 죽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사람의 눈 앞에 두심으로 죽음을 선택하게 했을까요? 심각한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되기로 사람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창조되었('이사야 43 : 21' 외 많음)습니다. 능력자 주권자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사람의 목적인 것입니다. 이 언어는 상당히 교조적으로 쓰였기에 거부감이 들수도 있지만, 친근한 관계가 아니고서는 어찌 찬양함에서, 경배함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에 우릴 종처럼 학대하려하지 않으십니다. 싫은 일 억지로 하게 하려는 분이 아니라, 그 분 안에 거하는 것으로 우리가 기쁨을 누리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눈을 돌림으로 죄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 집중된 하나인 하나님을 포기함으로 사람은 죄의 영역에 들어갔고, 그 결과 인생의 자연스러움은 '찌꺼기'를 양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렇게 좋아하는 '증거'를 위해 선악과 나무를 그들 눈에 보이게 두셨고, 사람은 그것에 기대어 오히려 하나님을 찾았다고 봅니다. 상대적이고 역설적으로 - 네거티브하게 - 기준이 되는 것이 있기에 하나님을 보는 자세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눈 앞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죠. 그리고 그 영향으로 우리는 찌꺼기를 양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낸, 그 분이 허락한 구세주의 헌신과 보혈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청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이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


Seek the LORD while he may be found; call in Him while he is near.
찾을 만한 때에 주를 찾고, 그분이 가까이 있을 때에 그를 부르라. 

이사야 55 : 6

 

 

 이 말씀은 삶의 자연스러움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죄 안에 거하는 저로서는, 늘 죄의 짐에 허덕이는 제게 이 말씀은 불가능해보입니다. ㅜ 아담과 하와는 이 이야기를 잊고, 죄를 지음으로 죄의 속성이 '자연스러운 것' 되게 했습니다. 현재의 환경은 원죄 이후의, 홍수 이후의 체제로 재편되어 있고, 그분의 아들이 오고, 십자가에 죽었다가 살아나 승천함의 이후로 재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것'으로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평안에 이르게 합니다 - 그것이 죄 이전의 상태로 사람을 되돌리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아담과 하와의 시절처럼 선악과는 우리의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의 삶 속에서 그것을 먹든지 포기하는 순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자연스러움은 이런 상황에 있습니다.
 

 이전 아담과 하와처럼 곁에 계시고 늘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잊고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조상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죄의 시작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묻고 계시고 손짓하고 계십니다. '아들아 나를 보렴', '나와 함께하자꾸나'. 다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들이 많습니다. 자유의 남용. 하나님을 잊음... 언젠가 그분을 볼 수 없는 날이, 가까이 계시지 않는 날이 오겠지만 지금까지는 아니었던 것일 뿐입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아버지 외에는 알지 못하기에(마태복음 25 : 13) 깨어 있어야 합니다. 가까이 계실 때 그 분을 부르는 것, 찾을 만한 때에 그 분을 찾는 것,그 것이 지혜입니다. 비록 이러한 일이 현재의 자연스러움을 거스르고, 그렇기에 거북하지만 깨어 있음으로 그 분을 부르고 찾을 수 있으며 그 보혈로 삶의 찌꺼기가 씻겨져 나갑니다. 그 과정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을 취하는 것이 가장 큰 승리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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