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교회 ① 역사 _ 이스라엘 예루살렘

2014. 6. 5. 07:30익숙함과 거리감/중동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관한 신앙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원죄로 인한 영원한 죽음을 해결할 방법으로 구약시대에는 모세오경에 나오는 율법과 동물을 제물로 하는 제사들이 제시되는데, 예수가 십자가에서 스스로 제물이 됨을 믿는 이로 인해 그 죄가 씻어진다는 신앙. 그것이 기독교의 처음이자 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핵심과는 별개로 지역 토속신앙(미신)과 결합된 형태로 예수에 관한 수많은 유물들이 성물 중의 성물로, 특히나 최후의 만찬 때 쓰여졌다는 성배, 매달리고 죽었던 십자가,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를 쏟게 했다는 롱기누스의 창,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쓰였던 수의 등이 공인, 비공인 최고위급 성물이 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 편의상, 영문은 그대로 넣겠지만 교회 건물을 지칭할때 '○○교회'라고 쓰겠습니다. 로툰다, 바실리카 등 건축양식이자 건축물의 이름을 번역할 단어가 마땅치 않네요. 외국의 역사나 건물 등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데는 이런 문제가 상존하는 것 같습니다.


감람산에서 바라본 성묘교회(우)와 뮤리스탄(좌)




1. 예수의 흔적

어찌되었든 예수의 마지막 발자취가 담긴 비아돌로로사 Via Dolorosa (십자가의 길) 14포인트는 예루살렘 성지순례의 제1코스로 손꼽힙니다. 십자가 형을 언도받고 걸어간 길도 기념하는 마당인데 옷이 벗겨진곳 (point 10), 십자가에 못박힌 곳 (point 11), 십자가 형벌을 당한 곳 - 매달린 곳 (point 12), 죽어서 뉘어진 곳 (point 13), 죽어서 묻히고 부활한 무덤 (point 14). 등은 어떻겠습니까. 거룩한 무덤 - 성묘교회 聖墓敎會, Church of the Holy Sepulchre는 비아돌로로사 14포인트의 10-14포인트가 밀집한 곳이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공인한 성지 중의 성지입니다(Church of the Holy Sepulchre 주님의 무덤 (기념)교회, 예수 무덤 (기념)교회 - 카톨릭 / Church of the Resurrection 부활 기념교회 - 정교회로도 불립니다. 용어가 다양하지만 여기서는 성묘교회로 통일하겠습니다).


2. 성묘교회의 시작

현재 예루살렘 올드시티 기독교인 구획안에 위치한 성묘교회는 A.D. 70년 경 완전히 파괴된 예루살렘을 로마풍의 도시로 재건한 하드리아누스 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재위 A.D. 117-138) 시대에 비너스 Venus(베누스,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던 자리에 지어진 것입니다. 하드리아누스가 지었던 신전 자리가 어떻게 골고다 Calvary 언덕, 그리고 예수의 무덤으로 공인받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A.D.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후 헬레나가 예루살렘 순례중 계시를 통해 알아냈다는 설이 가장 널리알려져 있습니다. A.D. 2세기 하드리아누스 시절 로마풍으로 재건된 예루살렘은 곳곳이 평탄화되었는데, 어찌되었든 예수 시절 당시의 흔적을 재현, 혹은 끼워맞추려는 시도가 교회 내부 곳곳에 산재해있습니다.


3. 첫번째 성묘교회

로마의 입장에서 예루살렘, 이스라엘은 강대한 페르시아와의 접경지대가 됩니다. 세계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들, 기독교인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강대한 적국과의 접경지대로서 예루살렘은 계륵과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로마의 영화가 쇠하고 레반트 지역을 비잔틴이 승계했을때도 페르시아의, 이슬람과의 뺏고 빼앗기는 자리에 놓여있던 곳입니다. 로마의 입장에는 공인된, 국교화된 성지로 성묘교회를. 페르시아 - 이슬람은 이교도의 성지로 성묘교회를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지배국가가 바뀌면서, 침략을 당하면서 그 존폐가 갈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로마풍으로 재건된 시대의 성묘교회는 비너스 여신을 위한 신전이었습니다. 혹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기독교인을 싫어했기 때문에 골고다 언덕과 무덤 등의 유적을 덮어버리기위해 신전을 지은 것이라고 기록했는데, 정황상 그리 큰 신빙성을 갖지 못합니다. 로마풍으로 재건되며 자연스럽게(?) 지어진 신전을 허물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하나의 핑계가 되지 않았는가 추정됩니다. 게다가 헬레나는 로마 전역을 다니면서 곳곳을 성지화 시키며 자신의 이름을 높인(?) 인물입니다. 아무튼 326년 철거된 신전 터에 대한 발굴이 일어나고, 이곳에서 예수가 못박혔던 성십자가와 무덤 터가 발견되었다고 발표되면서 '예수가 죽음을 맞이하고 묻혔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한 교회가 세워집니다(동시대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헬레나 모후에 의해 베들레헴 예수 탄생 기념교회도 세워집니다). 이것이 첫번째 성묘교회입니다.

4세기에 건설된 첫번째 성묘교회는 두개의 건물이었습니다. 첫번째 건물은 현재 건물의 모양 상 앞, 혹은 위(제대가 위치하는 곳)에 해당하는 로툰다 Rotunda 입니다. 이 돔 구조물 안에는 예수의 무덤 유적을 감싸는 이디큘 Aedicule (라틴어 Aediculum, 작은 건물)을 세워 말그대로 예수의 무덤을 기념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당시 부활교회 Anastasis Rotunda라고 불렸습니다. 또 다른 건물은 십자가가 섰다고 믿어지는 그자리, 골고다 언덕 유적과 연결되었던 대성전 Great Basillica입니다. 순교자 기념교회 Martyrium, 열주 아트리움 Triportico 등으로도 불리는데 여기서는 대성전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하겠습니다.




첫번째 성묘교회는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 Khosrau II or Parvez가 예루살렘을 침공했던 614년 화재로 인해 손상을 입었고, 보관되어 있었던 성십자가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호스로 2세 치하 페르시아는 비잔틴 제국의 이집트, 레반트 지역을 탈취하기도 했을만큼 군사적으로 강력함을 뽐냈지만, 비잔틴 제국에 등장한 헤라클레이오스 Ηράκλειος에 의해 점령했던 영토를 잃게 됩니다. 결국 630년, 헤라클레이오스 황제는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성십자가를 재건된 성묘 교회에 반환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아라비아사막에서 갑작스럽게 이슬람제국이 등장해 634년 다마스커스를 점령했고, 637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성묘교회 또한 이슬람제국의 수중에 떨어지게 됩니다.

초기의 무슬림 통치자들은 도시의 기독교 유적지의 파괴와 주거지로의 사용을 금지하여 성묘교회를 비롯해 자신들이 점령했던 중동 대부분의 교회가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정책을 두고 '이슬람의 관용'이라고 하죠. 어찌되었든 타 종교인에게는 추가 세금을 걷을 수 있었으니 관대하다는 평가도 얻고 경제적 실익도 얻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슬람 통치자들은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대다수의 국가가 그랬듯이 강력한 왕권을 위해 적절한 수준의 긴장과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이런 흐름에서 예루살렘의 이슬람 지배자들은 성묘교회를 중심으로한 기독교인들의 순례와 결집에 관대하게 혹은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1009년 당시의 지배자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알-하킴 비-암르 알라흐 Al-Hakim bi-Amr Allah는 선임(?)들이 하지 않았던 시도를 하게됩니다(예루살렘의 지배자가 동쪽의 압바스 칼리프 조에서 파티마 칼리프 조로 바뀌면서 예루살렘 토착 지배층의 변동이 일어난 것도 이유가 됩니다). 성묘교회를 파괴한 것이죠. 파괴할 수 없거나 운반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파트 외에 파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한 이 사건은 기독교 세계에 큰 충격을 줍니다. 이 사건의 소식을 접한 유럽 곳곳에서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반유대 운동이 일어나고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일어날 정도였다고 합니다(파티마의 칼리프를 자극한 세력이 유대인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사람들은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 사건은 훗날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는 명분이 됩니다.


4. 두번째, 세번째 성묘교회

두번째 성묘교회는 칼리프 알 하킴의 아들 칼리프 알리 아즈-자히르 Ali az-Zahir 치세였던 1027-28년 파티마 - 비잔틴 간 협상의 결과 건축되었습니다. 1009년 파괴 이후 소규모의 복구는 있었지만 본격적인 복구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기독교계는 이 협상을 통해 성묘교회의 중건을 꾀하게 됩니다. 하지만 막대한 금액을 투입했음에도 골고다 언덕에 해당하는 대성전 부분은 손도 대지 못합니다. 부활교회 - 로툰다를 중심으로 건물이 회복되었고, 대성전에는 십자가 사건과 관계된 일들을 기념하는 작은 교회를 세웁니다. 이런 구성은 '하늘 향해 열려있는 뜰과 다섯개의 작은 교회 a court open to the sky, with five small chapels attached to it.'라는데 (출처 : 위키피디아) 뭔 말인지... 아무튼 이런 구성의 성묘교회는 십자군 전쟁 시기까지 이어집니다.
- 이 협상으로 인해 성지 예루살렘에 성묘교회(성묘교회를 본부로 하는 예루살렘 총대주교좌까지)를 복구하고 개종을 강요 받았던 많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슬람교의 철회가 이루어 졌다고 합니다. 그 외에 알-하킴에 의해 파괴된 다른 성당들을 복구했는데, 오는게 있으면 가는게 있는 것이 협상입니다. 파티마 칼리프 측은 콘스탄티노플에 모스크를 다시 열고 예배하는 것을 회복했으며, 비잔틴 제국에 억류되어 있던 자국 포로 5천명을 귀환시킵니다.

현재와 같은 형태의 성묘교회로 지어진 것(편의상 세번째 성묘교회라고 하겠습니다)은 십자군 전쟁 시기와 맞물립니다. 십자군 파병의 표면적 명분은 '예루살렘 순례를 방해하고 기독교 성지를 파괴하는 잔악한 이슬람을 몰아내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자'는 류였습니다. 실제 결과물은? 조금 다르게 나타났습니다만. 아무튼 로마카톨릭 교황청의 총동원령에 따라 각지에서 세력다툼을 하던 다양한 영주들이 군사를 이끌로 아나톨리아로, 레반트로, 마그렙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예루살렘을 탈환합니다(1099년).
예루살렘에는 예루살렘 왕국이라는 영주국가가 세워지고, 이들은 이 곳에 온 목적에 걸맞게 성지의 파괴된 교회들을 복구, 보수, 재건축하게 됩니다. 두번째 성묘교회를 조사하고 관리하던 예루살렘 왕국과 사람들은 대성전이 위치했던 폐허 지하의 우물에 붙은 소문 - 헬레나가 십자가를 처음 발견한 곳이다 - 을 믿었습니다. 그곳의 첫 이름은 성십자가 발견교회 Chapel of the Invention of the Cross 였는데, 그 우물에 닿기 위해 팠던 길을 넓혀 성녀 헬레나를 기념하는 교회 Saint Helena Chapel로 삼았습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 MHz`as 제작




십자군은 성묘교회에 대한 조사와 함께 교회를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 탈바꿈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 11세기 중반에 복원된, 다섯개의 두번째 성묘교회가 통합된 현재의 모습이 윤곽을 드러냅니다. 십자군의 본부가 되기도 했고, 최초의 라틴 총대주교좌 본부가 되었으며(이전의 총대주교좌는 정교회의 총대주교좌였습니다), 예루살렘 왕국의 기록실이 자리했습니다. 1149년 예루살렘 왕국의 멜리센데 여왕의 시절에 완공된 이 건물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로마카톨릭과 서유럽 군정의 약 90년간의 예루살렘 정복은 살라흐 앗 딘(통칭 살라딘)이라는 명장이 등장하면서 그 수명을 다하게 됩니다. 


5. 성묘교회를 둘러싼 분쟁과 현재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이슬람 국가의 지배를 받아왔지만, 성묘교회는 기독교인의 성지로 자리할 수 있었습니다. 성묘교회의 특수성과 상징성 때문에 많은 종파가 소유권을 주장하고 타 교단 대비 독점권을 얻으려 노력해왔습니다. 때문에 오히려 이슬람 정권에 아부와 로비를 하면서까지 독점권을 얻으려 했습니다. 15세기부터 공고화 된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성묘교회를 향한 각 종파의 분란과 다툼은 술탄의 칙령으로 중재가 이루어져왔습니다. 그러던 결국 다툼에 지친 오스만 투르크는 1767년 성묘교회의 주도권을 신청하는 종파들이 건물의 각 부분을 분할, 관리할 것을 명하는 칙령을 발표합니다.

1808년 성묘교회에 화재가 발생해 로툰다 부분이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보수가 필요해진 로툰다의 돔이나 이디큘의 외관은 당시 오스만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건축되었습니다. 성묘교회 건물에 관한 각 종파의 분란과 수리, 보수 등에 관한 문제가 계속 제기되자 오스만 투르크는 1853년 '현상유지 status quo - remain forever 칙령'을 내립니다. 이 시점부터 성묘교회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는 이상 수리할 수 없으며, 심지어 성묘교회의 기물조차도 그 시점에 있었던 자리를 이동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날 성묘교회에 들어가는 출입구 2층 난간에는 한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그것은 현상유지 칙령 이후 변치 않고 거기에 있는, 무려 160년 이상 한 자리에 있는 사다리입니다.
 


시간이 되어 닫히는 성묘교회의 문. 문지기는 무슬림이다. 현상유지 칙령으로 약 160년간 이동이 없었던 사다리가 2층 창문 난간에 보인다.


더구나 각 부분이 나눠지고 갈라지면서, 어느 종파에서도 출입구를 보수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슬람 제국(아이유브 술탄조)이 다시 예루살렘을 회복한 1192년, 살라딘이 성묘교회를 자신과 가까운 두 무슬림 가문들에게 나누어 관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637년에 칼리프 오마르의 통치 때부터 교회의 관리인 보직을 맡았던 누쎄이베흐 가문은 문지기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조우데흐 가문은 문의 열쇠를 맡았는데, 그 전통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