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아 소피아 ① 주변 상황과 역사 _ 터키 이스탄불

2014. 5. 14. 11:27익숙함과 거리감/중동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의 이름은 15세기 중반 오스만 투르크 왕조의 비잔틴제국 점령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라틴어 콘스탄티노폴리스), 그보다 오래된 이름은 비잔티움입니다.
그리스시대에는 어촌에 불과했던 이 곳은 로마의 확장과 함께 지역적 중요성이 부각되어 중소도시로 개발됩니다. 하지만 현재의 대도시가 되는데에는 거대로마제국의 동서분할정책과, 로마의 부흥을 꿈꾸던 황제(콘스탄티누스)의 계획이 맞아떨어진 결과일 겁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거대제국의 쇠락을 막을 동력으로 '새로운 로마 Nova Roma'라는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것이 A.D.330년, 콘스탄티노플의 탄생입니다. 다만 콘스탄티누스 당시에는 '노바 로마'로 불렀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재건과 천도가 것이 정치적, 도시적 안배였다면, 보다 이른 시기인 A.D.313년 공인한 기독교의 경우는 종교적, 정신적인 안배입니다. 로마(서방)카톨릭이나 동방정교회나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성군이자 대제로 이해하는데 주저함이 없겠지만, 정작 황제는 세례를 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합니다.


북쪽으로는 홍해, 남쪽으로는 지중해(에게해)와 연결되는 보스포러스해협 옆의 도시 '이스탄불'. 현재는 대도시가 되어 양쪽의 큰 반도 모두가 이스탄불에 편입 되었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소피아 성당, 블루모스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표시된 곳)이 이스탄불의 중심지에 불과했다.



이 천도와 기독교 공인, 두가지 사건은 동력을 다해가는 로마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줍니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거대 로마 제국은 '정식으로' 동-서로 분열되며, 기독교 또한 동서로 분-열되지만 그 정수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양쪽에 존재하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서방은 5세기 무렵 게르만족의 침략을 견디지 못해 그 지배권을 잃게 되지만, 로마 교황청은 살아남아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동방은 이후로도 약 1000년 가까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통치를 지속해 동로마제국, 혹은 비잔틴제국이라고 불렸습니다.
종교적으로 서로마의 멸망이후에도 지금까지 존속, 그 영향력을 잃지 않은 로마카톨릭이 존재합니다. 동로마에는 정교회 - 옥소도스 Orthodox가 존재해 비잔틴제국 영내의 기독교를 관장했습니다. 로마가 서방카톨릭의 중심인 것처럼 콘스탄티노플은 동방정교회의 중심지가 됩니다. 다만 처해있는 주변 환경 때문인지 동방정교회는 정치적인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면, 서방카톨릭은 주변 군소국가들(?)을 통제하는 세속 국가 위의 통치자로 군림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런 특징은 정교회가 각 지역, 국가, 민족별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카톨릭이 교황청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정교회의 지역(동로마)에는 총대주교좌가 네 곳 -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안티오키아(안디옥, 하타이), 알렉산드리아 - 이었고, 카톨릭은 로마 한 곳만 있었기 때문에 분권적, 집권적 특징이 갈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기아 소피아와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자미)사이 광장에서 올려다 본 하기아 소피아의 전경, 유명한 얼굴(?)이지만 사실은 왼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하기아 소피아 Αγία Σοφία, 아야 소피아 Ayasofya라 불리는 이 소피아 대성당은 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정교회의 총 본산입니다. 원래는 천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우스 2세의 명으로 목조 바실리카 구조로 지어졌다고하는데(A.D.360) 불과 40여년 뒤인 404년 소실되었고,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415년 재건되었으나 이 또한 532년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당시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것을 요구하며 물리학자 이시도로스와 수학자 안시미오스에게 설계와 공사를 맡겨 5년 11개월이라는 단기간에 완성시킵니다(A.D.537). 오늘날 보기에도 거대한 구조의 건물을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에 지은 겁니다. 하기아 소피아를 다 짓고나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도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다만 짧은 공사기간(아마도 황제의 재촉이 있었을거라 보입니다)은 건물 자체의 부실을 낳았고, 안그래도 지진대에 속해있는 이 지역에서 지진이 날때마다 파손이 생기는 일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중앙돔은 건축 20년 뒤인 558년 지진에 의해 무너져서, 하기아 소피아를 설계했던 이시도로스의 조카가 보수하게 됩니다. 이때 원래의 돔보다 약간 낮춰지고, 구조가 보강되었다고 하는데, 이때의 기간이 4년이었다고 하니, 전체 공사가 얼마나 빨리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돔의 무게가 워낙 무거웠기 때문에 돔을 지지하는 벽들이 점점 밀려나는 현상은 피할 수 없었고, 이를 보강하기 위해 서유럽의 고딕성당에서 볼 수 있는 '버트레스'형태의 버팀목들이 건물 외부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교적 초기에 지어진 기독교 건물이다보니 세세한 장식없이 단촐하게 꾸며졌었다고 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모자이크들은 하기아 소피아가 동방정교회의 중심지로 역할하는 1000년의 시간동안 꾸며진 것들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제국의 수도가 되어 두 번 함락됩니다. 1000년의 역사치고는 매우 적다고 볼 수도 있는데 지형적 특색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두 번의 함락이 하기아 소피아의 모양을 크게 바꾸게 되었는데, 첫번째는 1204년 십자군원정대가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온 때였고, 두번째는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비잔틴제국 점령 때였습니다.
첫 함락이었던 십자군원정군에 의한 함락은 재물과 성물에 눈이 먼 십자군들이 하기아 소피아에 안치되어 있던 많은 성물들을 유럽으로 빼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때 콘스탄티노플에 '라틴제국'이 세워졌고, 약 60년간 비잔틴제국의 명맥이 끊깁니다(니케아지역으로 이주한 니케아제국으로 불리기는 합니다). 전쟁의 목적이 영토, 명예, 성물로 바뀌어가던 십자군의 비극을 보여줍니다. 이 때 동방정교회 사람들은 '십자가 든 악마에 견주면 초승달 이교도가 그래도 사람이다.'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베네치아 총독 '엔리쿠스 단돌로'의 명판. 십자군을 부추겨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함락시킨 장본인이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거둬 베네치아로 가져갔으며, 성 소피아 성당에 있던 성물과 성상도 찬탈해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을 꾸미는 데 썼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공로를 인정받아 시신이 이곳 하기아 소피아에 묻혔다(1205년). 1261년에 비잔틴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탈환해 단돌로의 석관묘를 파헤치고, 그의 유골을 거리의 개에게 던져주었다고 한다.



두번째 함락은 비잔틴제국의 종말을 고했던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점령입니다. 이때부터 하기아 소피아는 모스크로 개조되는데, 당시 술탄이었던 메흐메드 2세는 하기아 소피아의 약탈을 금지하고 벽에 가득했던 성화에 회칠을 명합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모자이크들은 1931년까지 터키의 국부 아타투르크의 허용하에 회칠이 제거된 것들입니다. 회칠을 제거하는 작업은 이슬람계의 반발로 인해 중단되었지만, 드러난 모자이크까지만 정리해서 현재의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변에 네개의 미나렛 Minaret은 이슬람사원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던 바예지드 2세, 셀림 2세의 시기인 16세기 초반에 세워진 것입니다.


술탄 메흐메드 2세 시대를 그린 그림. 성당의 규모를, 그리고 이 곳을 개조해 예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져있다(물론 그렇게 빨리 회칠하고 개조했을리는...)



이스탄불 곳곳에는 정교회성당이 모스크로 개조된 사례가 있는데, 이 곳들에도 벽에 그려진 이콘들은 모두 회칠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덧칠해진 석회 덕택에 이콘 모자이크 들이 더 잘 보존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뒤따릅니다. 또한 하기아 소피아의 건축방식과 웅장함은 비잔틴제국 뿐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에도 영향을 주어 이 지역에 지어진 모스크들은 하기아 소피아의 특색을 닮게 지어져있습니다. 또한 중동에 있는 많은 모스크들 가운데 이른바 '터키식 모스크'들의 원형이 되는 것도 바로 이 하기아 소피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