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훈련에 대한 오해

2015. 2. 21. 04:03나의 중얼중얼/오답노트

이제 조금은 흔한말이 되었는데, 기독교계에서는 '훈련'이라는 말을 쓰곤한다.

영적인 부족함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의미에서 훈련을 쓰기 시작했는데... 영적인 부분이란게 자칫하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단점이...
때문에 종종 영적훈련이 되었느니 안 되었느니를 정죄의 의미로 쓰는 경향도 있다.

문제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윗선이 되어 자신의 말을 따르는 것을 순종으로, 따르지 않는 것을 불순종으로 여길 때 시작된다. 순종한 사람은 훈련이 된거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훈련이 안된거고...
기독교적인것도 아니고, 지극히 유교적인 장유유서... 군사부일체 적인 '대가리우선주의'가 교회에 만연해 있는 이유는, 지배층(? 대가리)의 지배논리를 정당화해줄 일종의 접촉점이라 그렇다.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이유는 두가지다. 이 두가지는 어쩌면 같은 동전의 다른 면일 거다. 하나는 공감능력의 부족이고. 또다른 하나는 공부하지 않아서이다.
근래들어 갑질논란이 계속되고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일치한다. 갑질하는 이들과 당하는 이들의 공감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를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훈련이 부족하다느니... 훈련을 더 받아야 한다느니 말하는 수많은 대가리들을 보면, 자기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훈련을 받았는지 묻고 싶다. 진짜 훈련은 회개하는 삶을 사느냐 마느냐로 판별되고, 그것을 판가름하는 판사는 하나님이 되신다. 회개는 뒷전으로 미뤄둔채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지배논리를 정당화하는 그들의 감언이설과 성경구 인용, 간증 등의 모든 짬뽕은 역겹기 그지 없다.

(혹자는, 넌 누구길래 대가리 운운하면서 비방질이냐 할 수 있다. 건전하고 방향성있는 비판과 맥락없는 비방은 그 정도가 다르다. 비판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카톨릭을 비판해서 나온 프로테스탄트 전체의 방향성을 부정하는게 아닐까?)

힘들면 투정부릴 수 있다. 나름대로 변명을 하자면, 사회의 갑들과 교회의 대가리들은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이의 힘들다는 소리는 듣지 않은채 자신의 소리만 강요하고 있다는 면이다. 그리고 아쉬움 섭섭함등을 모두 맘대로 해석하고 끼워맞춘다. 그런면에서 이 둘은 완벽하게 닮아있다.
우리의 대가리들은 왜 사회가 교회를 경멸하는지 생각해봤을까? 교회에서 헌신하는 이들이 줄어드는 이유에대해 고민해봤을까? 그런 고민이 없다면, 교회에 미래는 없다.

*1* 사실 교회는 어떤 껍데기 일뿐이다.
*2* 교회또한 사람의 모임이기 때문에 연약할 수 밖에 없다.
*3* 존경받기 합당한 분들도 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 분들께는 향기가 난다.
*4* 나라고 부족하지 않을까... 이런 글 싸질러놓고 회개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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