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설에 부쳐서 _ 유달영

2009. 11. 25. 16:47보고듣고읽고-/글을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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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설에 부쳐서
전진을 위한 회고와 전망


 

유달영柳達永


 
 

 어느 날 나는 텅 빈 운동장에서 두 팔을 앞뒤로 높이 휘저으면서 혼자 걸어가는 한 어린이를 지나쳐 볼 수가 있었다.
 
 밤 사이 내린 첫눈으로 뒤덮인 운동장은 동녘 하늘에 솟아오르는 햇살에 더욱 눈이 부시었다. 그 흰 눈 위를 생기가 넘치는 그 어린이는 마치 사열대 앞을 행진하는 군인처럼 기운차게 신이 나서 꺼덕꺼덕 걸어가는 꼴이 하도 익살맞아서 나는 혼자 웃음을 참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린이는 가끔 그 활발한 행진을 멈추고 차려의 자세로 서서 고개를 돌려 뒤를 한동안씩 바라보다가 전과 똑같은 보조로 두 팔, 두 다리를 높직높직 쳐들면서 다시 걸어가는 것이었다. 옥판선지玉板宣紙같이 깨끗한 흰 눈 위에 작은 발자국이 자국자국 무늬져서 길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이 어린이는 눈 덮인 운동장을 꼿꼿하게 일직선으로 걸어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걸어가다가는 발을 멈추고 서서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가 어느 정도로 똑바른가를 검토해 보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어린이가 걸어간 발자국은 부분적으로는 곧았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여러 곳에서 바른편으로 또는 왼편으로 굽어 있었다.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면서 그 어린이의 행동을 통하여 적지않은 것을 느꼈고, 또 배울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부귀빈천을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누구나 자기들의 일생을 곧고 바르게 걸어가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걸어간 그 생애의 발자취들은 작고 큰 허다한 파란 속에 가지가지의 복잡한 곡선을 그리고 가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영원히 끝을 맺고 마는 것이다. 인생은 결국 눈 덮인 들판에 가지가지의 발자국을 남기고 걸어가는 나그네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눈 덮인 운동장 위를 걸어가는 저 어린이가 짬짬이 걸음을 멈추고 서서 고개를 돌려 자기가 걸어온 발자국을 그윽히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슬기로운 일인가?
 
 공자의 뛰어난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증자曾子는 "내가 날마다 세 차례씩 스스로 반성해 본다 吾日三省"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날마다 일기를 쓰면서 지나간 하루의 생활을 살펴본다. 주말에는 1주일의 생활을 더듬어 살펴보는 것이다. 또 누구나 자기의 생일에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생활을 어렴풋이나마 되씹으면서 자기의 걸어온 삶의 발자국을 바라보게 된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뚫어보고 스스로 자나온 자국을 살펴보는 일은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자기 자신과 스스로 걸어온 발자취 를 때때로 돌아다보지 않고서는 걸어가는 옳은 방향을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스도가 "손에 쟁기를 쥔 사람은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고 제자에게 경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경고는 결코 걸어온 과거를 살피고 되씹어 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사람이 뚜렷한 큰 목표를 세운 다음에는 그 목표를 잠깐 동안이라도 놓치지 말고 한결같이 앞으로만 나아가라는 뜻이다. 눈 덮인 운동장을 일직선으로 걸어가고자 애쓰는 저 천진한 어린이의 발자국이 곳곳에서 구부러진 데 대하여 우리는 그 원인을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저 어린이의 세심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발자국이 곳곳에서 구부러진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저 어린이가 만일 운동장 저편에 서 있는 큰 포플러나무나 또는 전신주를 일정한 목표로 삼고 그것만을 향하여 한결같이 걸어갔더라면 저 어린이의 발자국의 줄은 매우 곧게 되었을 것이다. 그 어린이는 앞을 향하여 곧게 나가려고 치밀하게 주의를 했었지마는 먼 앞에 움직이지 않는 일정한 큰 목표를 세우는 슬기가 아직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으로서 각각 자기 자신의 한결같은 목표가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하여 가면서, 때때로 자나온 과거를 보살피고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경주장에서 아무리 빠른 속도로 달린다고 하더라도 골을 향해서 달리지 않는다면 그 달음질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신의 귀중한 일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는 한스럽다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나'에 있어서 두 가지의 '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 개인으로서의 '나는' 물론이지마는, 또 우리라는 사회인으로서의 '나'의 존재를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작은 나'와 '큰 나'라고 한다면, 우리는 더욱 알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인생의 걸음걸이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작은 나'와 '큰 나' 의 이중의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 민족이 장구한 역사의 험한 길을 걸어오다가 이제 비로소 세계 무대 위에서 살 길을 열어 보고자 거족적으로 분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시기에 있어서 우리가 '작은 나'로서의 행로의 목표와 회고도 중요하지마는 '우리'로 서의 행로의 확고한 목표와 겸허하고 정성스런 회고가 절실히 요청된다. 첫눈이 내린 오늘, 나는 눈 벌판을 걸어가던 저 어린이를 더욱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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